<아니… 나야 상관없는데, 어차피 당신은 내 말을 못 알아듣잖아.>
사실 부끄러워서 말은 안 꺼냈는데 당신의… 직원들 중 제 옛날 친구가 있어요.
<오, 누군데?>
그런데 그분도 부끄러웠는지 아는 척을 안 해주시더군요. 매우 서운했지만 내색 안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 정도면 친구가 아니었던 거 아닐까? …근데, 당신 내 목소리가 들려?>
동랑 님, 이분은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분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거야, 삼조 씨. 마치 태엽 달린 인형에 대고 걱정거리를 중얼거리는 꼬마 시절로 돌아간 것 같잖아?
…혼잣말 하고 있었던 거야?
<둘 다 뭐 하자는 거야?>
제가 여러분께 의뢰를 부탁했던 것도 그 친구의 영향이 커요.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더 믿음이 가는 법이잖아요.
보이십니까, 제가 이래서 한치도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정에 흔들리셔가지곤…
그러니까 단테 씨는 저와 그 친구 사이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모른 척해주세요. 알겠죠?
<애초에 그 친구란 게 누군지 모르겠다니까…>
나로써는 한숨을 깊게 뱉어가며 고개를 저었던 것이지만…
애초에 성립되지 않았던 대화는, 시작할 때처럼 멋대로 끝나 버렸을 뿐이었다.
<이게 부탁이냐. 통보지.>
여긴 연구실 복도입니다. 보통의 일반인이라면 여기까지밖에 못 들어오겠지만…
동랑 님의 특별 초대이기도 하니… 이 안쪽까지 안내해 드리죠.
와… 저도… 이런 커다란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그럼, 림버스 말고~ 이런 데에 입사 지원해 보지 그랬어?
농담이죠, 로쟈 씨? 이런 곳은 아무나 못 입사해요. 엘리트 중에서도 최정상 엘리트만이 올 수 있는 곳이란 말이에요.
마치 파우스트 씨나 이상 씨 같이…
마침 이스마엘이 좋은 운을 띄워주었기에, 아까 듣지 못한 질문을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왜 둘은 하고많은 회사 중에서 림버스에 입사한 거야? 선택지는 많았을 텐데.>
저는 파우스트니까요.
<…….>
명쾌하게 해답을 내준 것 같은 어조에는 어떤 질문도 할 수가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상 씨는?>
구태여 돌아 묻겠소. 관리자, 그대는 왜 이곳에 입사한 것이요?
<그거야,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잖아.>
…귀하가 스스로 답을 내주었구려.
<…….>
최정상 엘리트만 입사할 수 있다는 이스마엘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는지,
연구실 내부는 모두가 집중하고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정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단테 단테 단테, 봐 봐… 봤어? 냉장고에 간식들이 잔뜩 있어! 하나… 아니, 열 개는 슬쩍해도 티도 안 날 만큼!
그리고 그 정적을 깨부수는 건 우리의 몫이었고.
넉넉하게 챙겨 가세요. 삼조 씨, 이따가 탕비실 간식들 소분으로 포장해서 이분들한테 나눠줘.
알겠습니다.
대박이다, 이스, 지금이라도 나랑 이직 준비할까?
다 들려요, 로쟈 씨…
로쟈 씨, 근로 계약에는…
농담. 파우스트 씨. 농담. 응?
<…….>
그럼 이제 의뢰 내용을…
이젠 하다 하다 외부인들까지 들여오고… 회사 견학까지 시켜주는 거야, 동랑?
아. 잠깐 실례, 이분은 슈렌느예요. 옆 부서 팀장이자 제 입사 동기인데, 저한테 상처 입히는 말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게 주요 일과시죠.
회사에서 네 팀에 할애하는 복지비가 이런 식으로 낭비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 한 명쯤은 말을 해야 하지 않나 싶었거든.
아, 복지비에 대해 궁금한 거라면… 올해의 최우수 부서 트로피를 받아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치, 삼조 씨?
최우수 부서가 받는 혜택을 전부 이야기하자면 날 밤을 새야 할 정도죠.
아, 둘 다 똑같이 재수 없어.
흠. 라이벌인가? 어딜 가나 잘난 사람일수록 시기하는 사람도 많은 법이지.
시기는 발전의 원동력이니, 잘난 쪽이 참아 줘야죠. 어제 그 파이 가게에서 회식비로 사온 거. 슈렌느 부서에도 돌릴까, 삼조 씨?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후추 고추 상추 카레 맛으로요.
헉… 그것도… 맛있겠는데?
하하… 그럼, 마저 얘기를 해보죠.
소문은 들었어요. ‘황금가지’라는 유기물을 수집하는 신생 회사가 있다고.
그리고 그 ‘황금가지’라는 건 폐쇄된 로보토미 지부에서만 발견되고요.
황금가지의 존재는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얼마 되지는 않았어요. 몇 달 전까지 연구실 근처의 로보토미 지부 시설을 연구실로 쓰고 있었거든요.
그 끔찍한 곳에… 연구소를 차렸다고?
하, 하지만 전부 매몰되었다고 했는데요…
뭐… 각종 희귀한 자원이나 자료들이 남아있었을 테니까…
…연구 대상에 환상체도 포함되었던 건가요?
알아보시는군요. 연구원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존재죠.
그렇다면 연구원이란 건 죄다 미친놈이군…
…잠깐.
너, 설마 그때 헛소리하면서 닭 대가리한테 돌 던진 것도…
흠흠…
히스클리프 씨는 가끔씩, 예상치 못한 통찰력을 보여주실 때가 있네요.
당신들이 우연을 가장하여 뒤틀림을 소탕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것도, 환상체 연구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정보들을 얻기 위함이었군요.
우리 삼조 씨는 연기가 영 능숙하질 못해요. 평생을 올곧게만 살아와서 그런가.
이해해 주세요. 저희로서는 뒤틀림과 환상체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 재간이 없었거든요.
‘마음이 산산이 허물어졌을 때…’ 뒤틀린다고 했었나요? 멋있는 비유였어요. 그렇다면 당신들이 허물어진 마음을 원상 복귀시켜 준 건가요?
무너진 마음을 대신 쌓아 올려주는 방법은 없어요.
길을 가르쳐 드린 거예요. 계속 머물지, 그곳으로 걸어갈지는 은봉이네 호프집 사장님의 선택이었죠.
와, 당신 정말 많은 걸 아는군요. 제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펄쩍 뛰면서 당신에게 하이파이브라도 시도 했을 거예요.
언제든지 사양하죠.
동랑 님, 또 이야기가 새고 있습니다.
아, 그렇네요. 자… 우리가 로보토미 지부 시설에서 행복하게 연구를 하던 어느 날, 그곳에서 무력 습격 테러가 일어났어요. 아주 갑작스럽게요.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걸 본 적 있나요? 장관이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시작되고 끝나버리더군요. 우주 같죠?
테러를 일으킨 세력은 어디였지?
인원의 신분은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제각각이며, 목적 또한 불명입니다.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최근이었거든요.
결국 동랑 씨 팀이 머물고 있었던 연구실은 그 테러 집단들이 점령해 버렸습니다.
음. 연구실은 그때 옮겼던 것인가 보군.
…피해는 어느 정도요?
이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동랑이 듬성듬성 남아있는 빈자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비어 있는 자리들은 말이죠…
당분간은 공석일 거예요. 죽었거든요. 그때의 테러로.
자세히 보니, 비어 있는 자리에는 추모를 하는 중인 듯 과자나 꽃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아, 이 친구는 손가락만 겨우 건졌는데 둘 곳이 마땅하지 않아서 따로 보관 중이에요. 저쪽 2층 진열장에 있을 거예요.
숙연한 침묵이 사무실을 맴돌았지만 동랑 씨는 빈 책상을 손으로 쓸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다.
너무나 많은 걸 두고 와야 했어요.
…동랑 씨…
특히 제 얼굴 캐릭터로 만들었던 상장 패를 놓고 왔어요, 되게 좋아하는 기념품이었는데.
이거 참,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알 수가 없어 저 양반은.
그러면 저 자리는 어떤 자리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기만 한 새하얀 책상을 바라보았다.
아, 저 자리는 예정된 자리예요.
새로운 직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죠.
앗… 그럼 모집 요강이 따로 있는 건가요? 어디 가면 볼 수 있죠?
큼큼.
이스마엘이 눈을 반짝이며 정보를 캐내려 했으나 삼조의 불쾌한 헛기침 소리에 가로막혔다.
이크, 우리 삼조 씨 심기 불편해졌다. 이제 진짜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삼조 씨.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서로 윈윈 플레이를 하시죠.
빼앗긴 연구실을 되찾아 주신다면 당신들에겐 저희가 발견한 황금가지의 소유권을 양도하겠습니다.
질문드리죠. 확정계약인가요? 아니면 사후검토계약인가요? 방식은 대표기관집행방식인가요? 공동집행방식인가요?
답변하겠습니다. 하자책임 없이 대표기관집행방식으로 즉석 계약 방식입니다. 1급 계약사무소를 이용한 입회인을 둔 계약도 절차대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계약 사무소…? 뭐, 뭐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복잡하게 해야 하는 건가?>
J사에서는 제대로 된 입회인을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황금가지를 곧바로 넘겨받지 못했잖아요.
아… 그 미리우치 파의 우이드 그 자식? 로쟈가 게임에서 이겼는데 약속 안 지키고 묻지마 싸움 걸었잖아.
마리아치 파의 아이드인데…
네, 맞아요, 입회인이 되어줄 줄 알았던 아이드 씨가 쏜살같이 태도를 바꿔 버리는 바람에 무력으로 가져와야만 했었죠.
그래서 입회나 공증을 해주는 협회나 계약 사무소를 이용하는 편이 돈은 많이 들어도 제일 안전한 거예요. 파우스트 씨도 그 점을 제일 주의 깊게 보았을 거고요.
이스마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다닥 말을 올려붙였다.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흔하게 알려진 방법인가 본데…
이건 확실히 저희 쪽에 유리한 체결 방식이군요.
목적만 확실히 달성한다면요.
…둘이 동시에 합창하는 걸 다들 입을 벌린 채로 지켜보았다.
비밀인데, 전 사실 삼조 씨가 하는 말의 절반 이상은 못 알아들어요.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거죠.
우연인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적어도 동랑 씨는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하, 그래도 K사 연구실과 계약을 맺으면 당분간은 그분들과 싸울 일은 없겠어요.
아무리 상처 입혀도 끊임없이 치료되었던 분들이요.
잠시 모두가 숙연해졌다. 그때의 기억은 괴롭고 끔찍했던 순간들로 범벅 되어 있었기에.
아, 저희 K사만의 재생 기술을 이미 보셨나 보네요.
아우, 봤기만 했겠어?!
지긋지긋할 만큼 겪고 또 겪었지…
앗… 그럼 대신 기념으로 제 실험실 보여드릴까요? 여기 말고… 엘리베이터를 한 번 더 타야 해요.
끄엑? 거기까지 보여주실 생각입니까, 동랑 님? 관계자 외 출입 금지인 곳인데…
하, 방금 삼조 씨 엄청 웃긴 소리 냈다. 뭐 어때. 계약 체결한 기념으로 놀러 가보는 거지.
기념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히 반대하는 사람도 없으니 따르기로 했다.